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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러시아 5인조의 아버지라 불리는 작곡가 글린카 [Mikhail Ivanovich Glinka]

러시아 5인조의 아버지라 불리는 작곡가 글린카 [Mikhail Ivanovich Glinka]

러시아 5인조에 대해 아시나요?

 

러시아 5인조는 1856~1870년에 활약한

러시아의 클래식 작곡가 그룹입니다.

 

차마 아마추어라고 부를 수 없는

러시아의 위대한 천재 작곡가 5명입니다.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알렉산드르 보로딘, 세자르 큐이와

밀리 발라키레프를

러시아 5인조라 불립니다.

 

이제 러시아 5인조에 대해 살짝은 이해하셨죠?

 

그럼 오늘은 러시아 5인조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으며, 

러시아 19세기 전반의 대작곡가인

글린카에 대해 공부를 하고

 

다음 포스팅에는 러시아 5인조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러시아 5인조의 아버지라 불리는 작곡가 글린카 [Mikhail Ivanovich Glinka]

글린카를 알아보기 전

글린카 이전의 러시아 음악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글린카 이전의 러시아 음악

 

18세기 전반의 러시아에서는

아직 음악은 단순한 오락의 수단으로 생각되어

천한 것이라 하여 귀족이 다룰 것이 못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또 순수 기악보다 오페라나 가곡(가사가 있는),

무용을 위한 음악이 존중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후세의 러시아 음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 무렵의 음악은 거의 다

외국인의 손에 의하여 존재했었으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점차로

러시아인 작곡가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로맨스'라는 정서적인

감미로운 피아노 반주가 붙은 가곡 형태가

러시아적 예술가곡으로 탄생했습니다.

 

이를 낳은 것은 귀족계급의 딜레탕티즘이라 합니다.

 

"딜레탕티즘"

예술이나 학문을 치열한 직업의식 없이

취미로 즐기는 것을 말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

음악은 겨우 예술로 생각하게 되었고

상류계급에서 작곡이나

연주에 힘을 기울인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습니.

 

이들 귀족 아마추어 작곡가들의 딜레탕티즘이

이후에 러시아의 뿌리 깊은 전통이 되고

러시아 음악의 원천이 되었던 것입니.

 

"프랑스 혁명"

1789년 7월 14일부터 

1794년 7월 28일에 걸쳐 일어난

프랑스의 시민혁명

 

19세기 초엽 이와 같은 작곡가에는

<꾀꼬리>로 대표되는 로맨스 작곡가

아라비에프(1787-1851)

<빨간 사프란>으로 알려진 오페라 작가

와르라 모프(1799-1861)가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이 실패로 끝나고

러시아가 강국으로 크게 어필하게 되자

당시 유럽에 고조되고 있던

민족주의와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 국내에서도 민족의식에 각성하여

슬라브 중심사조가 높아졌습니다.

 

상류사회에서는

"고뇌하는 세계를 구원하는 대러시아"

문학적 사명에 적합한 강력하고 국민적이며

애국적인 작품의 욕구가 높아졌습니다.

 

그러한 결과로 음악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고

그와 같은 사명을 지닌 예술로 승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회적, 문화적 조건이

글린카를 낳았고

이어 러시아 음악의 개화를 가져왔습니다.


글린카 - Mikhail Ivanovich Glinka

(180461 ~ 1857215)

 

대표작품

오페라

황제에게 바친 목숨(1836 초연)

 

이반 수사닌 (1836)

 

루슬란과 류드밀라(1842 초연)

스페인 서곡

1번 호타 아라고네사에 의한 화려한 카프리치오(1846)

 

2번 마드리드의 여름밤의 추억(1851)

관현악법

카마린스카야 (1848)

가곡

마르게리타의 노래 (1847)


글린카 - Mikhail Ivanovich Glinka

(1804년 6월 1 ~ 1857년 2월 15일)

 

스몰렌스크의 노보스파스코예 태생인

러시아의 작곡가 글린카는

러시아 영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그는

할머니의 과보호로 집 밖 활동을 하지 못하였는데,

이때 할머니에게 들었던 러시아 성가와 민요는

이후 그의 음악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근처에 사는 외삼촌의 손에 양육 되었는데,

그의 외삼촌은

자신소유의 오케스트라를 가질 만큼

음악애호가였습니다.

 

글린카는 외삼촌 덕분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과 같은

전통 음악가들의 작품을 자주 들었고,

가정교사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습니다.

 

그는 13살 때인 1817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귀족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당시 많은 음악가들이 러시아 문화의 중심지였던

상트페트르부르크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글린카는 필드(John Field, 1782-1837)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고,

메이어(Charles Mayer, 1799-1862)에게

피아노와 작곡을 배우는 등

다양한 음악적 경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음악가가 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공공도로 사업부(Department of Public Highways)

관료로 입사하였고,

대신 아마추어 음악가로

작품 활동을 계속 하였습니다.

 

1830년 그는 병을 핑계로 일을 그만두고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서

이탈리아 작곡가인

도니제티와 벨리니의 오페라를 접한 후

감명을 받아 오페라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3년 동안 밀라노 음악원 교수인 바실리

(Francesco Basili, 1767-1850)에게 음악을 배웠고,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1847),

베를리오즈 등과 교류하였습니다.

 

그리고 러시아로 돌아오던 중

베를린에 들러 5개월 동안 음악이론가이자

유명한 음악 교사였던 덴

(Siegfried Dehn, 1799-1858)에게

음악이론과 작곡을 배웠습니다.

 

183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정착한 글린카는

푸시킨(Alexander Pushkin,1799-1837),

고골리(Nikolaj Gogol, 1809-1852) 등의

민족주의 시인들과 어울리면서

민족주의 극음악 작곡에 착수하였고,

 

1836년 러시아어와 러시아 민요를 사용한

최초의 민족주의 오페라 이반 수사닌

(Ivan Susanin,1836)을 완성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러시아 민요를 연구한 후

러시아 민요와 춤곡 선율을 사용하여

작곡한 두번째 오페라루슬란과 루드밀라

(Ruslan and Lyudmila, 1842)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지,

그 관혁악법은 리스트나

베를리오즈로부터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오페라의 실패에 큰 충격을 받은 글린카는

1844년부터 1845년까지 파리에 머물면서

베를리오즈의 도움을 받아

표제음악과 관현악법을 공부하였는데,

 

특히 러시아 음색을 표현하기 위한

독자적인 관현악법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스페인으로 떠나 여행하며

스페인 민속 선율에 영감을 얻어서

스페인 서곡 제1

호타 아라고네사에 의한 화려한 카프리치오

(Capricho brillante Para gran orchestre sopra

la Jota Aragonesa, 1846)

 

2마드리드의 여름밤의 추억

(Souvenir d'une nuitd' été à Madrid, 1851)

작곡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바르샤바(제정 러시아령)에 정착하여

러시아 민요와 러시아 음색을 표현한

독자적인 관현악법을 바탕으로

카마린스카야(Kamarinskaya, 1848)을 완성하였는데,

이 작품은 이후 러시아 작곡가들의 관현악 작품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글린카는 러시아 민족주의 오페라를 창시하였고,

러시아의 독자적인 관현악법이 발전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러시아 민요를 연구하여

러시아어의 억양을 표현한 선율을 작곡하는 데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이러한 특징은 그가 평생에 걸쳐 작곡한

가곡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이러한 작품들 중 하나인 가곡

마르게리타의 노래’(Песнь Маргариты, 1847)

그가 스페인에 머무르며 완성한 작품이며,

 

모음곡집마르게리타 노래의 성악곡으로

거버(Eduard Ivanovich Guber, 1814-1847)

괴테의실 잣는 그레첸을 러시아어로 번역한 시를

가사로 사용하였습니다.

 

글린카는 민요 선율을 작곡의 재료로 사용할 때

주요 선율을 리듬, 화성 등의 변화를 통해

계속적인 새로운 변화를 주면서 전개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작품의 다이나믹과

동일주제의 변화에 의한 다양한 색채감이 강조되는데,

곡의 뼈대가 되는 선율은 그대로 두고

배경만 바꾸어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배경 바꾸기’(fresh background) 기법으로 불리며,

러시아인들이 오랫동안 즐겨 사용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또한 글린카가 스페인 및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각 나라의 민속음악을 수집하며 소재로 다룬 것은,

이 후 러시아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작곡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글린카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단지 민속음악을 사용한 것이 아닌,

음악의 언어와 형식에 있어서 대담하고 독창적으로

러시아적인 개념을 수립하였다는 것에 있습니다.

 

글린카는 러시아 안에서 널리 인정된 최초의 작곡가로,

러시아 고전 음악의 아버지로 여겨집니다.

 

후대 러시아 작곡가,

특히 러시아 5인조에 많은 영향을 주어

러시아만의 고전 음악 작풍을 주도하였습니다.

 

글린카는 '러시아 국민악파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는

19세기 전반의 대작곡가인데,

그것은 순수한 러시아 음악을 만들려는

이상에 불을 붙인 최초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창시한 러시아 국민 음악은

다음 세대인 무소르그스키, 보로딘 등

'5인조'의 작곡가들에게 계승되어서

화려하게 꽃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