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

러시아 음악의 역사적 배경

러시아 음악의 역사적 배경

러시아는 서쪽으로는 유럽과 접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한국, 일본 등의 극동지역,

그리고 북미대륙으로까지 이어지는 방대한 국가이다.

 

이 같은 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러시아에는

100여 종 이상의 언어와 풍습을 지닌

다양한 종족들이 살고 있다.

 

그들 중 대다수를 차지하고

러시아의 역사를 이끌어온 민족은

슬라브족이다.

 

러시아의 역사는 4000년 전부터라고 하는데

문헌상 추적할 수 있는 것은 9세기경부터이다.

9C

러시아는 하나의 통일된 대제국으로서 보다는 크냐즈라고 하는 소공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10C

러시아 역사의 가장 중요한 뿌리는 키에프공국으로서 이들은 10세기 말에동방교회로부터 히랍정교를 받아들이면서 비잔틴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13C-14C

키에프의 뒤를 이어 13-14세기에는 노브고로드(Novgorod) 시대가 열렸다.

 

이 시대에는 농민반란 혹은 전쟁 등을 주제로 하는 노래가 항간에 널리 퍼졌다.

14C-17C

모스크바

시대

모스크바가 정치, 문화, 음악의 중심지가 되었다

15C

러시아는 더 이상 분열된 공국으로서가 아니라 통합된 국가로서의 기반을 굳건히 하면서 세습적 전제왕권을 확립하게 되었다.

 

이 모스크바 시대에는 이탈리아, 독일, 터키 및 아시아 국가들과도 교류를 갖기 시작하였다.

17C

17세기에 들어와서는 새로운 도시문화가 형성되면서 서방의 영향을 받은 전문 음악인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테오도르 1세 시대 (TsarTheodore I, 1584-1598)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오르간과 버지날이 보내졌다.

젊은 음악인들을보리스 고드노프 시대 (Boris Godnov, 1598-1605) 외국으로 보내 훈련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드미트리(Dmitry, 1605-1606),페오도로비치황제(Tsar M.Feodorovitch, 1613-1645)와 미하일로비치(A. Mikailovich, 1645-1676) 시대를 거치면서 서구와의 교류는 점차 증진되었다.

본격적인 서구화는 1682년 로마노프가의 표틀대제(Peter I, 1686-1725)가 즉위하면서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기면서부터이다.

 

그는 1711년 칙령을 발표하여 태도, 의상, 스타일, 걸음걸이 등 모든 면에서 서방을 모방하도록 지시하였다.

그 후 애나(Anna, 1730-1740), 엘리자베스(Elizabeth, 1741-1762), 그릭 카타리나 2(Catherine II, 1762-1796) 등을 거치면서 러시아는 서구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오페라 작곡가, 성악가, 연주자들이 러시아에 대거 방문하거나 이주하여 활동하였다.

 

이같이 초기의 러시아 예술 음악은 전적으로 외국 음악과 외국인에 의하여 지배되었다.

 

이 당시 음악은 양식상에서는 고전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나 작곡가의 개성과 민족적 특징, 그리고 그 후 1세기 동안 작용했던 염세주의는 명백히 찾아볼 수 있다.

18C

러시아 정교는 18세기 초 서구문화가 러시아 귀족계급에 침투하기 전까지 러시아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였다.

 

(이때 교회에서 부른 성가를 쯔나메니(Znameny)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러시아 최초의 교회음악이며 예술 음악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C

민족적인 기운이 감돌면서 러시아인에 의한 러시아음악을 쓰자는 주장이 대 두되었다.

 

미하일 글린카(Mihael Glinka, 1804-1857)를 러시아 예술 음악의 기초를 세운 낭만주의의 대표자로 들 수 있는데 그는 이반 수사닌(Ivan susanin), 루슬란과 루드밀라(Luslan and Ludmilla)등의 국민 오페라를 창시하면서 러시아음악의 본격적인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 뒤를 이어 리얼리즘(Realism)의 대표자인 다르고미시스키(Aleksander Dargomyzhski, 1813-1869)는 사실주의를 부르짖으며 오페라 석상의 손님 에서 러시아 억양과 악센트를 음악화하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양식 있는 귀족으로서 다르고미시스키는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단 계를 예지하고 젊은 작곡가들을 옹호하는 데 힘썼다.

이러한 국수주의적인 사상은 19세기 후반 러시아 5인조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세기말에는 이어 신 러시아파의 계승자인 글라주노프(Alexander Glazunov, 1865-1936)와 리아도프(Anatol liadov, 1855-1914) 등이 림스키코르사코프 와 함께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거점으로 하여 벨리아에프의 서클을 결성 하고, 국민주의적인 기악 음악 보급에 힘썼다.

 

이와 나란히 또 하나의 조류가 있었는데 이것은 서방의 후기 낭만주의 기법 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스크리아빈,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루빈스타인 형제, 스트라빈스키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스크리아빈은 신비주의적인 쾌락주의를 대표하면서 신비화음이라는 새로운 어법을 소개하였다.

 

라흐마니노프와 루빈스타인 형제는 러시아 피아니즘을 확립했으며 그들의 사상은 대위법의 권위자 타니예프에게까지 계승되었다.

또한 페테르부르크 음악원과 모스크바 음악원을 설립하여 음악교육에도 크 게 기여하였다.

 

차이코프스키는 독자적인 위치에 서서 서구적 기법과 국민주의, 낭만주의의 사상을 결합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스트라빈스키는 국민주의로부터 이탈하여 그만의 독특한 음악 세계를 펼치 기 시작하였다.

 

이같이 현대음악으로 향한 눈부신 음악발전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 나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혁명 이후 볼셰비키당은 작곡가들에게 일반 대중에 흥미가 있는 음 악을 쓸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새로운 실험 음악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당대 두각을 나타내던 작곡가들은 러시아를 떠나 서방으로 망명을 하게 되었고 남아있던 음악인들은 정부의 지침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새로운 정부의 지시에 따라 여러 가지 단체를 만들었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음악가 협회를 결성하여 노동계급에 적합한 예술형식 을 모색하는 한편, 현대음악 협회는 그 당시 유럽음악의 진보적 유형을 보여 주고자 노력했다.

 

그러다가 1923년에는 다양한 그룹의 목적과 이상을 결합시켜 음악적, 정치 적 측면을 조화롭게 통일하고자 하는 소련 음악가 연합이 형성되었다.

 


1917

10월 혁명은 공산주의 혁명으로 러시아의 왕정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하게 되며 (공산정권이 수립)

1918

소비에트 연방공화국(USSR)’이 성립되었다. 레닌의 혁명적인 정신이 소련의 정책에 그대로 반영이 되면서 그의 공산당 정권의 목적은 다중의 교육이었으며 교육뿐만 아니라 예술영역과 모든 생활영역을 통제하고 독재적인 권력 행사로 모든 레퍼토리는 검열 대상이 되어 정부의 이데올로기를 지지할 수 있고 강화할 수 있는 음악을 작곡하도록 하였다.

 

레닌: 예술에서의 실험을 장려,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면서도 어느 정도 자유로운 예술 표현에 비교적 관용을 베풂)

1920

1920년대 초가 되자 정부가 경제위기에 직면하게 되면서 예술에 대한 관리가 다소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1924

레닌의 사망 이후 그의 뒤를 이어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정치적인 억압이 계속되었다.

 

(1920년대 혁명의 소란은 러시아의 순수예술 작곡가들을 사라지게 했고, 시대적 요구로 혁명적인 민요가 나타났고 정부는 혁명을 찬양하는 음악만을 보호해주었다.)

1930

스탈린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선포했다. 낭만주의적 요소와 모호하거나 추상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고, 실험적인 기법들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으며 이해하기 쉽고 국가의 업적을 찬양하는 음악을 요구했다.

 

또한 대중들이 즐길 수 있는 곡을 창작해야 하며 사회주의의 기반인 노동계급의 현실을 그대로 모방해야 한다고 했다.

 

사용되는 재료 들은 러시아의 전통적인 것들을 활용하도록 하고 군사적인 측면들을 특히 강조했다.


1930년대의 소련음악은 망명 생활에서 복귀한 Prokofiev와 소비에트 정권 아래에서 성장한 Shostakovitch, Khachaturian 등에 의해 크게 번영

1934

식인 고전주의, 내용은 사회주의여야 한다는 사회주의적 현실주의가 정립되어, 음악과 삶의 관계가 강조된 감정적 내용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려는 경향이 생겼다.

1948

형식주의를 비난하는 법령으로 창조적인 분위기는 없어지고 보수적이고 무난한 경향을 띠게 되었다.

1953

스탈린이 사망하자 금지되었던 것들이 풀리면서 음렬주의나 바르톡, 힌데미트 작품과 같은 새로운 서구음악들이 소개되기 시작하였으며 소련 정부는 12음 기법이나 우연성음악같이 실험적인 음악들을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였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 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스탈린의 예술에 대한 주관적 태도를 비난하고, 예술가들의 창조적인 창작 활동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발표하였다.

 

1960년대를 전후하여서는 점차로 형식주의로 비난하였던 12음 기법도 흡수되고, 오늘날에는 실험적 작법도 허용이 되어 초기에 행해졌던 전위적인 작품들도 나오고 있다.


러시아 음악의 역사적 배경

정리 표

9C

소공국(크냐즈)

10C

키예프공국: 비잔틴문화의 영향

13C-14C

노브고로드(Novgorod) 시대

14C 후반-17C

모스크바: 정치, 문화, 음악의 중심지

17C

서방의 영향을 받은 전문 음악인들이 생겨

1890-1910

낭만주의에서 현대음악으로 가는 과도기

(전통적 요소와 현대적 요소가 공존)

1910-1920

진정한 20세기 음악이 시작된 시기

1917 볼셰비키 혁명 이후

: 볼셰비키당은 작곡가들에게

일반 대중에게 흥미가 있는

음악을 쓸 것을 지시하고

새로운 실험음악은 인정 하지 않음

 

작곡가들은 러시아를 떠나 서방으로 망명,

여러 가지 단체 만듦

1923

소련 음악가 연합이 형성


볼셰비키 혁명 이후

20세기 전반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

볼셰비키 혁명 이후 20세기 전반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

 


러시아 음악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이해하셨나요?

 

다음 포스팅은 러시아의 

여러 작곡가들에 대해 공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