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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클래식 음악]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Sergei Prokofiev (1891-1953)

[클래식 음악]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Sergei Prokofiev (1891-1953)

안녕하세요 만능로그 입니다.

 

오늘은 러시아의 작곡가 

프로코피예프에 대해 설명하려고 합니다.

 

피아노 음악하면 굉장히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음악만을 상상하시는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그 생각을 뒤빠꿀만한 곡을 작곡한

작곡가 프로코피예프

 

피아노를 타악기로 보며 

현대적 화성과 불규칙한 리듬, 

괴기적인 느낌이 많은 작곡가

프로코피예프 설명 시작하겠습니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Sergei Prokofiev

(1891-1953)

 

특징

피아노를 타악기로 봄

(리듬적, 타악기 요소와 서정적 요소가 큼)

 

현대적 화성, 불규칙한 리듬,

서정적 영향, 그로테스크

 

소나타 9

 

미국에서 살다가 다시 러시아로 돌아감

 

음악적 특징

토카타적 괴기적인 느낌이 가장 많음

여러 조성을 섞거나 원래 있던 것에서 추가함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Sergei Prokofiev

(1891-1953)

생애

1891

423일 지금의 우크라이나 '존트조브카(Sontsovka)'에서 태어남

1896

어렸을 때부터 가정에서 정기적으로 피아노 연주를 했으며 처음 곡을 썼을 때는 다섯 살이었고 열 살 때는 이미 몇몇 피아노곡들과 오페라를 작곡했던 음악 신동이었음

(5세 때 <인디안 갤럽> 이라는 간단한 피아노곡을 작곡, 9세부터 10세 무렵엔 오페라를 작곡)

 

그는 풍부한 문화적 환경에서 교양있는 부모의 도움을 받았고 어머니는 아들의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보고 모스크바에 세르게이 타네예프(Sergey Taneyev, 1856-1915) 교수와 만나는 자리를 마련함

1902

타네예프가 라인홀트 글리에르(Reinhold Gliere, 1875-1956)를 소개시켜 주면서 글리에르에게 2년간 배움 (화성법 기초와 형식과 관현악법을 배움)

 

13세때는 글라주노프의 권유로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리아도프에게 화성학을,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관현악법을 또한 체레프닌에게 지휘법, 에쉬포바에게 피아노를 배움

1904

프로코피예프의 어머니 마리아는 외딴 시골 마을에서는 양질의 음악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해, 1904년에 남편을 남겨둔 채 프로코피예프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함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사상 최연소 학생으로 입학 후 야망과 자신감이 대단해 서 무서운 아이라는 명성과 거만하다는 평판을 얻음, 그러나 작품에 불협화음이 많아 당시 음악원 선생님들께 좋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드뭄

1908

음악회에서 자신이 작곡한 <악마의 암시(Suggestion Diabolique)>로 데뷔 (이때부터 그는 평론가들에 의해 이해될 수 없는 초현대적인 음악이라는 평을 받음)

 

1908년 초에 프로코피에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45회 현대 음악의 밤' 이라는 모임에 참석해 자신이 직접 작곡한 <Four Pieces for Piano, Op.4)>을 직접 연주

1909

음악원 작곡과정을 마쳤을 때 불협화적인 작품성향으로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함

1910

아버지가 별세하고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게 되면서 5개의 피아노 협주곡 중 첫 곡 (1912)이 작곡되어 비평가들 사이에 큰 반항을 일으킴

 

(그는 작곡가로서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이 효과적임을 깨닫고 피아노 공부에도 매진해서, 음악원에서 졸업할 때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1>(1912)를 직접 연주하여 루빈슈타인상을 받음)

1914

대학을 떠나면서 파리로 여행을 떠났던 프로코피예프는 동포인 스트라빈스키가 급진적인 음악계의 일원이 되고 싶어 함, 그곳에서 안면이 생긴 댜길레프는 그에게 발레곡을 위촉하긴 했지만, 음악을 수용하지는 않음.

 

나중에 프로코피예프는 이 발레곡을 보완해서 관현악 모음곡으로 개작했고 <스키타이 모음곡(The Scythian Suite)>이라는 제목을 붙임

 

음악원에서의 마지막 해에 자신이 직접 작곡한 <Piano Concerto No.1, Op.10>을 연주하여 최고의 학생에게 수여되는 루빈스타인상을 받음

1917

프로코피예프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페트로그라드(1914년에 이름이 바뀐 상트페테 르부르크) 거리에서 벗어나 카프카스로 피신함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정치적 문화적 제압으로 음악이 설자리가 없다 생각하여 19185월에 러시아를 떠나 일본 등지에서 순회연주를 마친 후 미국을 망명함

1918

러시아 국내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볼셰비키가 예술을 탄압하자 프로코피예프는 1918년에 미국으로 망명을 하게 됨

 

미국에서 2년을 보내는 동안 그는 평론계의 한결같은 악평에 환멸을 느꼈지만, 리나 루베라(Lina Liubera, 아내)를 만나고 시카고 오페라단의 위촉을 받아 <세 개의 오렌지를 향한 사랑(The Love for Three Oranges)>를 써서 국제적으로 성공을 거둠

 

당시 라흐마니노프와 바르톡이 활동 중이던 뉴욕에서 성공적인 피아노 독주회로 데뷔

 

파리는 프랑스 6인조(프랑크, 오네게르,뒤레 등)와 가까이 지냈으며 러시아로 돌아오기 전까지 파리에서 생활함

1927

고국을 떠난 지 9년 만에 소련을 방문해 3개월간 연주 여행을 성황리에 마침

1928

교향곡 제3번과 발레 <돌아온 탕자(The prodigal Son)>를 작곡하였고, 그의 아들 오레그(Oleg)가 태어남

1930

미국, 캐나다와 쿠바로 긴 연주 여행을 떠났으며 이때 미국 의회도서관으로부터 현 악 4중주곡을 위촉받아 새로운 장르인 실내악곡을 시도함

 

그 후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고, 파리에서 더 이상 주목을 받지 못하자 1936년 다시 고국으로 돌아옴

(공교롭게도 그 당시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예술분야에 억압을 시작하고 음악에 사회주의적 내용과 러시아의 전통적이고 민속적인 요소를 지향하도록 권유)

 

(프로코피에프도 정부의 이념에 따라 쉽고 재미있는 작은 규모의 소품들을 작곡. 그때 서정성과 단순한 멜로디의 발레음악인 <로미오와 줄리엣(Romeo&Juliet)>,신데렐라(Cinderalla)> 를 작곡)

1933

그는 고국에 대한 향수가 커져 1936년 가족과 함께 러시아로 돌아옴

1936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구체화되어 예술 분야에 본격적인 억압과 테러가 시작 됨(1936-1938년 사이에 7백만 명의 러시아인이 체포되었는데 이 중 예술가도 상당수 포함)

 

하지만 프로코피예프는 정부에서 인정한 국제적인 예술가로 상당히 예외적인 대접을 받음 프로코피예프 자신도 이러한 정부의 노선에 부응하여 <어린이를 위한 음악(1935)>, <피터와 늑대(1936)>를 써서 어린이들에게 관현악단 악기에 대해 알려주기도 하였으며 애국적인 주제의 오페라, 발레 등을 많이 씀

1939

1939년과 1944년 사이에는 '전쟁 소나타'라 불리는 <Piano Sonata No.6,7,8>을 작곡

1941

전쟁이 일어나던 몇 해 동안에 프로코피예프는 1941년 아내를 떠나 오페라 <수도원에서의 결혼(The Duenna, 1940)>을 쓸 때 시인인 미라 멘델손(Mira mendelson)을 만나서 후에 결혼했고, 오페라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 1942)>, 발레곡 <신데렐라(Cinderella, 1944)>, <교향곡 5(1944)> 같은 걸작을 씀

1948

1948년에 안드레이 주다노프(Andrei Zhdanov)가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이 뿌리가 없을뿐더러 지나치게 형식적이라고 비난하자 엄청난 충격을 받은 그는 정권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매우 많은 합창작품을 작곡함

1953

1953년 그의 나이 62세 때 마지막 발레곡인 <석화(The Tale of Stone Flower, Op.118)> 의 교정을 본 후 모스크바에서 뇌출혈로 사망

 

(35일 스탈린이 사망하기 바로 몇 시간 전 뇌출혈을 일으켜 사망함)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Sergei Prokofiev

(1891-1953)

시기별 작품

초기

러시아 시기(1891~1918)

 

초기에는 프로코피에프가 작곡가이면서 피아니스트라는 특징을 담아내듯이 주로 피아노곡이 많이 작곡되었다. 어머니로부터 음악을 배웠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여러 종류의 음악수업을 받았다.

 

특징적으로 음악 수업을 받기 전부터 오페라를 작곡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시작하는 시기였다.

중기

서구에서의 시기(1918~1936)

 

중기에는 프로코피에프가 러시아 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의 혼란기 속에서 고국을 떠나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활동을 했다.

 

미국에서는 작곡가보다는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성을 떨쳤고, 유럽(특히 파리)에서는 피아니스트보다는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이 시기에는 오페라와 협주곡과 교향곡이 주로 많이 작곡되었고, 피아노곡은 주로 짧은 소품들이 작곡되었고 그 성격도 무겁고 내향적이라 초기의 외향적이고 활기있는 분위기를 가진 것과 대조된다.

후기

소련 시기(1936~1952)

 

프로코피에프가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 자신에게도 내적이고 심정 적인 변화가 있었고, 외부의 정치적인 변화가 영향을 끼친 시기이다.

 

그 영향을 받아서 이 시기에는 이전 시기와는 다른 곡들을 작곡하였다. 자유롭게 작곡을 하기 보다는 새로운 단순성과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따른 곡들이 많이 등장한다.

 

특이할 만한 것은 어린이들을 위한 곡들과 기존의 전통적이고 대중적인 작품에 작곡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그가 소련 정부의 제약과 건강상의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작곡의 열의를 보였다는 점은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Sergei Prokofiev에 대해 잘 이해하셨나요?

 

다음 포스팅은 프로코피예프의

작품작곡어법, 소나타까지 

다양하게 다루니 꼭 보러와주세요~